내 장비병의 끝을 본것 같습니다

저는 여태까지 수많은 브랜드의 카메라를 사용해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대부분은 흔히 말하는 고화소 카메라들이었습니다.
사진의 품질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품질이 좋으면 그 안에 담긴 내용 또한 자연스럽게 좋아 보인다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스마트폰으로 찍어도 아주 멋진 사진을 만드십니다.
분명 재능이고, 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저는 그런 재능이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사진을 찍을수록 장비에 더 의존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카메라를 선택할 때 늘 해상력과 스펙을 기준으로 삼아 왔습니다.
밝은 낮에는 대부분의 고화소 카메라들이 그럭저럭 괜찮은 결과를 보여주었습니다.
선명했고, 디테일도 풍부했습니다.

문제는 빛이 조금만 줄어들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해질 무렵, 흐린 날, 밤으로 넘어가는 순간부터
암부는 급격히 무너지고, 명부는 과도하게 튀어나오는 사진들이 반복됐습니다.
사진 전체의 균형은 깨지고, 고화소라는 장점은 오히려 거슬리는 요소가 되곤 했습니다.

그동안 저는 그 문제를 제 눈이 예민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은 보정을 잘 못해서 그렇다고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고화소 카메라로 옮겨 다니며 방황을 반복해 왔습니다.

그러다 두달전 저렴한 중고 핫셀 블러드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큰 기대를 했던 것은 아닙니다.
중형 카메라라는 점, 색이 좋다는 평가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저렴한 중고 핫셀의 밤 사진을 보고 생각이 멈췄습니다.
암부인 검은색을 보고 놀랐습니다
검은색이 이렇게 화려할수 있나 싶었습니다

검은색이 단순히 까만 덩어리가 아니었습니다.
먹색, 남색, 푸른 기운이 겹겹이 쌓인 어둠이었습니다.
암부가 버려지지 않고, 살아 있었습니다.

명부와 암부가 서로 대조적으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빛은 튀어나오지 않았고,어둠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사진 전체가 조용하게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원했던 것은 단순한 고화소가 아니라 정보가 사라지지 않는 사진,
더 정확히 말하면 정보가 사라지지 않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지금까지 사용해 왔던 고화소 카메라들은 밝은 순간에는 많은 정보를 보여주었지만,
빛이 줄어드는 순간 그 정보를 너무 쉽게 포기했습니다.

반면 핫셀 블러드는
시간이 어두워질수록 정보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낮보다 밤에서, 순간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차이가 더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카메라를 찾아 헤맨 것이 아니라
제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색과 톤,
그리고 시간의 밀도를 찾아 방황해 왔던 것 같습니다.

핫셀 블러드는
그 방황에 처음으로 마침표를 찍어준 카메라입니다.

더 이상 스펙을 비교하지 않게 되었고,
더 이상 장비를 바꾸는 데 돈과 에너지를 쓰지 않게 될것 같습니다.
사진을 다시 찍는 일,시간을 담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제 사진 기준에서 핫셀 블러드는 잘 찍지도 못하지만 제 사진여정의 
방황의 마침표에 해당하는 카메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