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브레송이라면?

예수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돌아보면, 인간은 단 한 번도 우상 없이 살아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시대든, 어떤 사회든 사람들은 늘 무언가를 절대적인 존재로 만들어 그 앞에 자신을 내려놓아 왔습니다. 신이 사라지면 이념이 그 자리를 대신했고, 이념이 무너지면 영웅이 등장했으며, 영웅이 실망을 안기면 사람들은 다시 다른 대상을 찾아 나섰습니다. 우상은 없어지지 않았고, 다만 형태만 바뀌어 왔을 뿐입니다.

저는 이 현상이 인간이 본질적으로 가진 한계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삶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노력은 언제나 보상을 약속하지 않으며, 결국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이 불확실성과 무력감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크고 절대적인 무언가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이 신이든, 권력이든, 명성이든, 혹은 시스템이든 말입니다. 그 대상이 실제로 완전해서가 아니라, 그 존재를 믿음으로써 잠시나마 안정을 얻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모습은 예술의 영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진을 볼 때조차 우리는 사진 자체보다 먼저 사진가의 이름을 확인합니다. 이름이 주는 권위는 생각보다 강력해서, 사진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보기 전에 이미 해석의 방향을 정해버립니다. 유명한 사람이 찍었다면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아무리 의미 있고 완벽한 사진이라 하더라도 무명인이 찍었다면 그저 스쳐 지나갑니다. 이는 사진에 대한 신뢰라기보다, 자신의 판단이 틀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외부의 권위에 맡겨버리는 행위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 극단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인공지능이 점점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하고, 더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하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AI가 그렇게 말했으니 맞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인공지능은 더 이상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판단을 대신해 주는 권위가 됩니다. 그리고 권위는 언제나 우상이 되기 쉽습니다. 인공지능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판단의 책임을 지는 일을 점점 더 버거워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가 경계했던 우상숭배란 단순히 조각상이나 금송아지를 섬기는 행위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게 해주는 절대자에게 기대려는 태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름이 무엇이든, 형상이 무엇이든 인간 대신 판단해 주고 결정해 주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언제든 새로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우상은 항상 우리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 안에서 만들어집니다. 두려움, 불안, 그리고 틀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그것을 만들어냅니다. 사진에서 이름을 숭배하는 것도, 기술을 신격화하는 것도, 인공지능에게 답을 맡기려는 것도 결국은 같은 구조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우상을 없애는 방법은 또 다른 우상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그 결과를 감당하겠다는 태도를 회복하는 데 있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신이든, 예술이든, 기술이든 그것들이 다시 도구로 돌아오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우상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요.

글을 맺으며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상은 결국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서 만들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던져보고 싶습니다. 아래에 올린 이 사진을, 만약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은 작품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구도와 빛, 순간에 대해 이야기할까요, 아니면 인간의 고독과 시대정신을 논할까요. 그리고 그 판단은 과연 사진을 보고 내린 것일까요, 아니면 이름을 보고 먼저 결정된 것일까요.


글 번호: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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