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는 왜 사라졌나 — 일제가 편찬한 우리 역사와 아직 끝나지 않은 식민사학
나는 《화랑세기》를 단순히 진짜냐 가짜냐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오히려 《화랑세기》를 들여다볼수록 더 큰 의문이 생긴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한국사는 도대체 누가, 어떤 자료를 가지고, 어떤 기준으로 정리한 역사인가?
우리나라는 흔히 기록의 나라라고 한다.
그 말을 조선시대에만 적용해서는 안 된다.
고구려에도 역사서가 있었고 백제에도 역사서가 있었고 신라에도 역사서가 있었다. 고려 역시 방대한 기록을 남겼다.
신라만 보더라도 거의 천 년을 이어온 나라다.
왕이 있었고 관청이 있었고 귀족이 있었고 전쟁과 외교가 있었고 종교와 교육이 있었으며 화랑이라는 독특한 조직도 있었다.
그런 나라에 기록 몇 권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고대 기록은 너무 적다.
바로 여기에서 《화랑세기》 문제가 시작된다.
김부식은 《화랑세기》를 실제로 봤다
《화랑세기》라는 책이 실제 존재했느냐는 문제는 논쟁할 필요가 없다.
김부식은 1145년 《삼국사기》에서 김대문이 《고승전》《화랑세기》《악본》《한산기》 등을 저술했다고 기록하면서 그 책들이 “아직*남아 있다(猶存)”고 분명히 적었다.
즉 김부식 시대에는 《화랑세기》가 전설 속 책이 아니었다.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고, 김부식이 참고할 수 있는 책이었다.
그리고 《삼국사기》 곳곳에는 김대문의 기록이 들어가 있다.
화랑과 사다함에 관한 내용 역시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중요한 원자료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하나는 분명하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화랑 이야기는 《화랑세기》 전체가 아니다.
김부식은 《화랑세기》를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 아니다.
자신이 편찬하는 정사에 필요한 부분만 골라 넣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읽는 《삼국사기》 속 화랑사는 김대문의 《화랑세기》 전체가 아니라 김부식이 선택하고 축약한 기록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당연히 질문이 생긴다.
김부식이 봤던 《화랑세기》 전체는 어디로 갔는가?
책이 사라졌다고 그 계통의 모든 필사본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옛날 책을 현대의 인쇄책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원본 하나가 만들어지면 사람들이 그것을 베껴 썼다.
원본 A에서 B가 만들어지고,
B에서 C와 D가 만들어지고,
다시 C를 베껴 E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렇게 필사본이 하나하나 만들어지면서 글자가 바뀌고, 문장이 빠지고, 주석이 본문으로 들어가고, 알아보기 어려운 옛 표현이 당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표현으로 바뀌기도 한다.
따라서 김대문의 자필 원본이 없어졌다고 해서 《화랑세기》 계통의 모든 이본과 필사본까지 같은 시기에 사라졌다고 단정할 이유는 없다.
그중 어느 한 필사본이 고려까지 남았을 수도 있고,
조선시대까지 내려왔을 수도 있고,
그 이후 해외로 넘어갔을 수도 있다.
여기서부터 일본 문제가 등장한다.
일제는 우리 역사를 쓰기 전에 먼저 우리 기록을 긁어모았다
일제는 조선을 점령한 뒤 한국사 편찬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1915년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을 시작했고,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를 거쳐 1925년 조선사편수회로 확대했다.
중요한 것은 완성된 《조선사》 35권만이 아니다.
그 책을 만들기 위해 일제가 얼마나 많은 자료를 조사했는가이다.
조선사편수회는 조선뿐 아니라 일본과 만주까지 돌아다니며 수천 점의 한국사 관련 자료를 조사했다.
조사·차용한 자료가 약 4,950점,
중요하다고 판단해 만든 복본이 1,623책,
사진자료가 약 4,500매,
편찬 과정에서 작성된 원고가 약 3,500책에*달했다.
그리고 그 방대한 자료를 다시 선택하고 줄이고 재배치해서 최종적으로 35권짜리 《조선사》를 만들었다.
나는 이 숫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4,950점의 자료를 보고 35권의 역사를 만들었다.
그 사이에는 반드시 선택이 들어간다.
무엇을 넣을 것인가.
무엇을 뺄 것인가.
어느 사건을 크게 다룰 것인가.
어떤 기록은 한 줄로 줄일 것인가.
역사왜곡은 거짓말을 새로 만드는 것만이 아니다.
있는 자료를 선택적으로 사용해도 전혀 다른 역사를 만들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으로 넘어간 한국 고문헌이다
일제가 조사한 자료 전부를 일본으로 가져갔다는 뜻은 아니다.
빌려 조사한 뒤 원래 소장자에게 돌려준 자료도 많았고, 조선사편수회 자료 상당수는 해방 뒤 국사관을 거쳐 지금의 국사편찬위원회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것과 별개로 한국에서 사라지고 일본에 남아 있는 한국 고문헌이 실제로 많이 존재한다.
일본의 황실문고, 대학도서관, 사찰, 개인문고, 옛 번주 집안의 문고 등에 지금도 한국 고문헌이 남아 있다.
대마도 종가문서 같은 자료는 규모 자체가 엄청나다.
그래서 지금 한국에 어떤 고서가 없다고 해서 “옛날에 완전히 소멸했다.” 라고 바로 결론 내릴 수는 없다.
한국에서 사라졌지만 일본에는 남아 있을 가능성을 반드시 함께 봐야 한다.
그렇다면 《화랑세기》도 마찬가지다.
김부식 시대까지 분명히 존재했던 책이다.
그 이후 어느 시기의 필사본이 일본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을 조사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박창화가 등장한다.
하필 일본 황실도서관에서 일하던 박창화에게 《화랑세기》가 나타났다
박창화는 평범한 재야 역사애호가가 아니었다.
그는 일본에 장기간 거주하면서 궁내성 도서료, 즉 일본 황실이 보유한 고문헌을 관리하는 곳에서 약 10년 가까이 촉탁으로 근무했다.
실제로 그는 일본에 있던 조선 고서를 열람하고 조사하는 업무를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박창화가 남긴 자료 가운데 《화랑세기》 필사본이 있다.
이제 연결이 자연스러워진다.
김대문의 《화랑세기》는 고려시대까지 존재했다.
그 후 원본의 행방은 사라졌다.
그러나 여러 필사본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한국의 많은 고문헌이 일본으로 넘어간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일본 황실도서관에서 한국 고문헌을 직접 다루던 박창화에게서 《화랑세기》 필사본이 나타났다.
나는 이 연결을 그냥 우연이라고 치워버릴 이유가 없다고 본다.
물론 아직 “궁내성 몇 번 서고에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있었다.” 라는 결정적인 장서기록이 발견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대로 “박창화가 아무 자료도 보지 않고 전부 창작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오히려 조사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박창화가 실제로 어떤 조선 고문헌을 열람했는지, 궁내성 도서료에 어떤 신라 관련 자료가 있었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를 찾아야 한다.
필사본의 언어가 원본과 완전히 같을 필요도 없다
여기에서 《화랑세기》 위작론이 제기하는 언어 문제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만약 박창화가 본 것이 김대문의 8세기 자필 원본이 아니라, 고려시대 필사본이나 조선시대 필사본 이었다면 이미 그 책 자체에 후대의 표현이 들어가 있었을 수 있다.
필사 과정에서 오래된 단어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또 박창화 자신도 뜻을 정확히 알기 어려운 고대어 몇 개를 전체 문맥을 보고 자기 시대의 표현으로 옮겼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일부 단어가 후대적이라는 사실은 이상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몇 개의 단어가 아니라 책 전체의 내용이 언제 만들어졌느냐이다.
후대 표현 몇 개가 발견됐다고 해서 수많은 인물과 사건, 혈통과 혼인관계, 정치적 관계까지 모두 20세기의 창작이라고 자동으로 결론 나는 것은 아니다.
무관랑과 월성의 구지는 그래서 중요하다
박창화본 《화랑세기》에는 사다함의 친구 무관랑이 밤에 궁장을 넘다가 **구지(溝池)**에*떨어져 다치고 얼마 후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이 과정이 빠지고 무관랑이 병들어 죽었다고 간단히 기록돼 있다.
나는 둘이 반드시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크게 다친 사람이 후유증으로 골병이 들어 죽었다면 후대 사가가 이를 단순히 병사로 압축했을 수도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구지다.
박창화는 1962년에 죽었다.
그런데 월성 성벽과 해자에 대한 본격적인 한국의 고고학 발굴은 그 이후 이루어졌고, 실제로 성 밖에서 해자와 연못형 시설들이 확인됐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한다.
박창화는 궁장 아래의 구지를 어떻게 알았는가?
하나의 우연이라면 우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박창화가 죽은 뒤 발견된 신라의 금석문과 목간, 지형, 궁성 구조, 왕족관계 등이 박창화본과 반복해서 일치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때부터는 단순 창작설보다
“박창화가 현재 우리에게 없는 고자료를 보았다.” 는 가설의 설명력이 커진다.
그리고 해방 뒤에도 식민지 역사편찬의 사람들은 남았다
여기서 또 하나 봐야 할 것이 있다.
조선사편수회에는 일본인만 참여한 것이 아니다.
이병도와 신석호 등 조선인 역사학자들도 직접 참여했다.
이병도는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와 촉탁으로 일했고 해방 후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어 한국 역사학의 중심인물이 됐다.
신석호는 조선사편수회에서 해방 때까지 일했고, 해방 후에는 국사관 설립과 교과서 편찬, 문교부 편수국, 국사편찬위원회로 이어졌다.
즉,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한국사를 편찬하던 사람이 해방 뒤 대한민국의 역사편찬과 역사교육에 다시 참여했다.
나는 이것을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라고 본다.
해방 이후 한국 역사학계가 식민사학을 비판하고 많은 내용을 수정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과 자료와 연구체계가 1945년 하루아침에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배워온 한국사에서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사료선택과 역사해석의 틀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계속 검증해야 한다.
그래서 《화랑세기》 문제는 단순한 고서 한 권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화랑세기》가 무조건 진짜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박창화의 창작이라고 먼저 결론 내리고 덮어버리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마지막으로 확인된 시기를 추적하고,
고려와 조선의 장서목록을 뒤지고,
조선사편수회가 조사한 수천 점의 자료를 다시 살펴보고,
일본에 남아 있는 한국 고문헌을 찾아보고,
박창화가 궁내성에서 실제로 어떤 책을 보았는지 조사하면 된다.
그리고 박창화본의 내용 가운데 그의 사망 이후에야 새롭게 밝혀진 사실을 하나씩 대조하면 된다.
이게 역사학 아닌가?
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제가 만든 35권짜리 《조선사》만 볼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책을 만들기 전에 보았던 수천 점의 원자료를 우리가 다시 봐야 한다.
거기에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역사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어쩌면 《화랑세기》의 흔적도 있을 수 있다.
《화랑세기》가 정말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한국에서만 사라진 것인지,
그것부터 다시 물어볼 필요가 있다.


